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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수준 차이 나는 축구 대결, 동화가 되다.

킴진 2021. 1. 25. 18:51

주택들로 옹기종기 둘러싸여진 영국 소도시 크로스비(Crosby)에 위치한 어느 작은 축구 경기장. 나는 그곳을 알지도 가보지도 못했지만 마치 꿈처럼, 동화 속 이야기가 펼쳐진 무대로 기억이 될 것이다.

 

마린FC와 토트넘의 경기가 열린 마린 트래블 아레나 (토트넘 트위터)

 

| 일방적인 경기 속 일반적이지 않은 이야기 

2021년 1월 10일. 150년 영국 FA컵 축구 역사상 가장 격차가 큰 팀 간의 대결이 펼쳐졌다. 영국 1부 프리미어리그 팀 토트넘과 8부 리그 축구팀 마린FC가 맞붙는 FA컵 64강 대결이었다. 결과는 5대 0으로 이변 없는 토트넘의 승리. 스코어만큼이나 토트넘의 일방적인 경기였지만 결코 일반적이지 않았던 특별한 경기였다. 

 

경기 시작 전부터 여러 매체들을 통해 양 팀의 엄청난 수준 차이를 분석한 내용들이 숱한 화제를 모았다. 토트넘 소속 선수들은 (당연히)전업 축구 선수들인 반면에, 마린FC 선수들은 교사와 물리치료사, 배관공 등 본업이 따로 있는 투잡 축구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린FC 선수들이 받는 최고 주급은 약 40만 원 수준이란다. 주장을 맡고 있는 나이얼 커민스 선수 또한 현지 학교에서 체육을 가르치고 있는 선생님이다. 아마추어급 투잡 선수들이 주말마다 경기를 치르면서 친목을 도모하는 우리나라의 조기축구팀과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는 마린FC 팀이었다.

 

반면 이날 교체로 출전한 토트넘의 가레스 베일 선수 주급은 약 8억 9000만 원으로 마린FC 선수들 주급과는 무려 2000배 차이가 난다고 하니... 사실상 두 구단의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겠다. 

 

후반전에 교체 출전한 토트넘의 가레스 베일 (FA컵 트위터) 

그렇지만 마린FC를 마냥 무시하면 안된다. 1894년에 창단해 올해로 무려 127년이 된 역사 깊은 축구클럽이라는 사실.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시대에 마린 축구팀이 창단된 것이다. (참고로 토트넘 팀 창단은 1882년이다. 마린FC 보다 12년 선배)

 

이런 8부 리그 팀 마린FC가 앞서 FA컵 본선 1라운드는 4부 리그 팀(콜체스터 유나이티드)을, 2라운드는 6부 리그 팀(해번트 앤드 워털루빌)을 차례로 무찌르고 3라운드 64강전에서 1부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노리는 토트넘과 기적처럼 맞붙게 된 것이다. 이점이 프로와 아마추어 모두 동등하게 섞여 뛰는 FA컵(영국 1부 ~10부 리그팀 대전)만의 특별한 묘미이기도 하고. 

 

마린FC 홈구장 주택가 창문에 붙여져 있는 응원 메시지 (토트넘 트위터)

경기 당일, 스포츠 매체들과 관련 SNS를 통해 FA컵 64강전이 열리는 마린FC 홈구장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곳은 거대한 골리앗과 맞서는 다윗처럼 비장함이 서려 있을거란 예상과 달리 온 동네가 축제 분위기였다. 승부를 떠나서 세계 최고로 인정받는 프리미어리그 선수들을 자기들의 작은 마을에서 볼 수 있다는 건 마치 우리나라에서 그들을 보는 것만큼이나 (같은 영국 안에서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내가 사는 동네의 조기축구 경기에 무려 토트넘 선수들이 대결하러 온다고 한다면... 와~ 이건 상상만 해도 미친거지!

 

코로나19 유행 때문에 무관중 경기로 진행됐지만 마린FC의 축구팬들은 경기 시작 전부터 경기장 근처로 삼삼오오 모여들어 그들의 꿈같은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우리는 경기를 즐길 것이다.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좋은 구단인지 보여주고 싶다"

경기 전, 마린FC 감독 | 닐 영 

 

 

|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의 미장센

드디어 역사적인 경기가 시작되고, 나는 새벽 2시 집에서 스포티비를 통해 생중계로 경기를 지켜봤다. 난 손흥민 선수의 팬으로 토트넘을 응원하지만 이날만큼은 마린FC의 팬 아니 축구라는 스포츠의 팬으로 축제를 지켜봤다. 이미 승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도 그렇고 스포티비의 해설진도 한 가지 우려했던 점은, 동네 작은 축구장인 마린FC 홈구장에서 송출되는 TV 생중계 화면의 퀄리티였다. 중동 같은 곳에서 열리는 축구 경기 생중계 중 간혹 8-90년대 화면처럼 저화질이거나 정신없는 카메라 앵글 등 아주 열악한 퀄리티로 현지 송출되는 황당한 방송화면을 몇 차례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역시 축구 선진국 영국답게 런던 웸블리 축구 경기장이든, 동네 작은 축구장이든 훌륭한 퀄리티로 전 세계에 송출했다. 카메라 설치할 곳도 마땅치 않았을 소규모 축구장과 어둑어둑한 광량(조명)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화면 앵글과 좋은 화질로 현장의 생동감을 전했다. 해설자는 경기장 주변 주택 옥상에도 방송 카메라를 설치한 것 같다고 말했다. 나 또한 매우 인상적인 광경이었는데, 마치 영화 세트장처럼 오밀조밀한 주택들을 배경 삼은 잔디밭에서 영국 최고의 축구 선수들이 공을 차는 장면은 처음 보는 신선함이었다.

 

주택가로 둘러싸인 작은 경기장에서 뛰고 있는 토트넘과 마린FC 선수들 (토비 알데르베이럴트 트위터)

집에서 창문 밖으로 와인 한잔 걸치며 경기를 직관하거나, 경기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철망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경기를 관람하는 주민들의 모습들을 중계 화면에 비춰주기도 했다. 모리뉴 감독이 앉아있는 토트넘 코칭 스태프석 철망 너머로 몇몇 주민들이 함께 경기를 관람하는 광경은 웃음을 자아냈다.

 

토트넘 코칭 스태프석 철망 뒤로 직관중인 주민들 (토트넘 트위터)

코로나19로 대부분의 스포츠가 무관중 경기로 치러지고 있고, 영국 축구 또한 마찬가지다. 빈 좌석들만이 가득한 경기장에서 20여명의 선수들만 뛰는 휑한 모습을 1년 동안 지켜보고 있고 어느덧 그 빈자리마저 익숙해질 때쯤 갑자기 관객의 온기가 전해지는 축구를 마주하며 이건 마치 현재가 아닌,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경기장 철망 뒤에서 경기를 즐기는 주민들 (토트넘 트위터)

눈에 익숙한 토트넘 선수들이 동네 운동장에서 묵직한 뱃살을 출렁이는 마린FC 선수들과 살 맞대며 뛰는 모습은 마치 영화라고 해도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꿈같은 현실, 마린FC 선수들과 경기를 지켜보는 크로스비 주민들은 정말 꿈같은 하루를 보냈으리라. 

 

"우리는 토트넘 선수들의 그림자를 쫓는데 그쳤다. 

하지만 뒤쫓는 유니폼 뒤에 적힌

그들의 이름을 보는 것조차 환상적이었다."

경기 후, 마린FC 주장 | 나이얼 커민스 (체육교사)

 

 

| 최선을 다해 이기는 것이 상대를 존중하는 것

토트넘 입장에서는 마린FC와의 대결은 이겨도 본전인, 다음 라운드 진출을 위한 관문이란 것 외에는 크게 득이 될 게 없는 대진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토트넘의 수장 모리뉴 감독은 경기를 준비하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좋은 선수들로 최선을 다해 준비해서 이기겠다. 이것이 상대팀을 존중하는 방법이다.”

 

골 성공 후 세리모니하는 토트넘의 비니시우스 (토트넘 홈페이지)

비록 토트넘의 에이스 헤리 케인과 손흥민 선수는 경기에 나서지 않고 1.5군의 선수진으로 마린FC를 상대했지만 무리뉴 감독의 말처럼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토트넘의 스트라이커 비니시우스가 터트린 첫 번째 골이 인상적이었는데, 이미 골키퍼를 제치고 아무도 없는 골문 앞 상황에서도 온 힘을 다해 강하게 차 넣는 장면이었다. 이는 약팀 앞에서 여유로운 태도가 아닌, ‘확인 사살’ 이란 느낌을 받을 정도로 골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이날 비니시우스는 무서운 집중력으로 전반에만 3골을 몰아넣으며 해트트릭을 달성했다.

 

"모리뉴 감독은 우리의 성취를 존중했다.

토트넘이 보여준 모습에 감사한다."

경기 후, 마린 FC 감독 | 닐 영

 

 

| 결과는 0 - 5, 0원에서 5억으로

FA컵 64강전에 출전한 마린FC 선수들 (마린FC 트위터)

마린FC에게 더 이상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대신 동화 같은 선물을 받게 됐다. 사실 마린FC는 코로나19로 관중 수입이 0인 상황, 구단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선수 해고 계획 등 경영난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선수들에게 자극이 되었을까, FA컵 본선 3라운드까지 진출하며 토트넘과 맞붙게 되고 이로 인해 TV 경기 중계권료(약 1억 1000만 원)와 경기 비용(약 3000만 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토트넘전이 무관중 경기였지만 티켓 구매자의 이름을 구장 외벽에 전시하는 '가상 티켓' 상품을 판매하는 마케팅으로 무려 4억 원이 넘는 수익을 추가로 얻게 되며 선수 해고의 위기를 넘기고 향후 안정적인 구단 운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0대5의 스코어가 0원었던 수입을 5억 원이 넘는 수익으로 창출해냈다. 졌지만, 행복할 수밖에.

 

"전 세계에서 티켓을 구매했다.

특히 수백 명의 토트넘 팬들도 티켓을 구입해 줬다.

나는 아마도 영국에서 가장 행복한

넌리그(5부 리그 이하)팀 회장일 것이다."

경기 후, 마린FC 회장 | 폴 레어리

 

 

| 코로나 시대에 쓰여진 동화같은 축구 이야기

마린FC 서포터즈에서 토트넘 팬들에게 전한 감사 영상편지 타이틀

코로나로 악화된 구단 경영, 선수 해고란 벼랑 끝 상황에서도 꿈과 현실 모두를 포기할 수 없었던 투잡 축구 선수들의 마지막이 될 뻔한 도전은 비록 FA컵 64강 탈락이란 현실에서도, 그들의 도전은 꿈처럼 계속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오래도록 지금을 이야기할 것이다. “내가 말이야, 낮에 자동차 팔면서 밤에 모리뉴 감독의 토트넘도 상대했었어, 가레스 베일 슛도 내가 막았다니까!”

 

"제 인생에서 다신 겪지 못할, 평생 남을 추억이다." 

경기 후, 마린FC 골키퍼 | 베일리 파산트 (자동차 딜러)

 

개인적으로 손흥민 선수 덕분에 영국 토트넘 축구팀의 팬이 됐고 또 그 덕분에 즐길 수 있었던 영국 어느 작은 마을에서 열린 축구 경기는, 사람들의 온기가 그리웠던 코로나 시대에 긴 여운으로 남을만한 따뜻한 동화로 기억될 것이다. 덧붙여 이러한 동화를 쓸 수 있도록 만들어준 환경, 아마추어들이 프로와 함께 꿈과 희망을 키우며 발전할 수 있는 영국 축구 시스템이 참 부럽기도 하고. 

 

 

 

킴진 | KIMZ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