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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정의 수상소감, 또 한편의 영화

킴진 2021. 5. 4. 17:00

난 영화 [미나리]를 아직 못 봤다, 아니 안 봤다. 왜냐하면 윤여정 배우가 연기한 순자 할머니를 보게 되면 몇 년 전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가 너무나도 생각나고 보고 싶어질 것 같기 때문이다. 이제서야 이별이 조금 무뎌지기 시작했는데... 몇 년은 더 지나야 볼 수 있지 않을까. 오스카 여우조연상에 빛나는 명연기를 맛보고 싶지만 우선은 (내 마음이 준비될 때까지)봉준호 감독의 평으로 그 아쉬움을 당분간 대신하고자 한다.

 

"순자 할머니는 윤여정의 연기 중 가장 평범했다.

하지만 가장 러블리했다."

봉준호 감독

 

 

| 윤여정의 단편영화, 오스카 라이브로 상영되다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가 50여 년의 경력을 지닌 배우 윤여정을 세계에 알렸다면, 오스카 수상소감은 배우 너머의 인간 윤여정을 세계인들의 마음에 각인시켰다. 4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위트는 물론이고 명확한 메시지가 담긴 그녀의 유려한 영어 수상소감에 모두가 완벽하다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개인적으로는 정답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수상소감에 '완벽'이란 수식을 붙이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완벽한 내러티브를 가진 인상 깊은 한편의 단편영화 같은 수상소감이었다고 표현하고 싶다. 

 

20여 년 전 나름 영화를 전공했던 낡은 책가방 끈을 오랜만에 붙잡고서 윤여정 배우의 수상소감을 영화의 씬으로 나누어 구성해 봤다. 다섯 개의 짧은 씬이지만 씬과 씬 사이에 함축된 50여 년의 맥락을 채우면 한편의 장편 영화도 탄생할 수 있는 뼈대 굵직한 하나의 단편 영화같은 수상소감이다. 

 

 

#1 프롤로그

 

긴장감이 감도는 오스카 시상식 무대에 선 여정.

위트 있는 첫인사로 분위기를 전환시킨다.

 

"브래드 피트, 드디어 반가워요.

영화 촬영 땐 어디 계셨을까요?"

 

 

#2 내 이름은 윤여정

 

재치 넘치는 풍자로 

윤여정의 이름을 정확하게 각인시킨다.

 

"유럽분들이 저를 어영, 유정이라고 하더라고요.

제 이름은 윤여정이에요"

 

 

#3 대모 배우의 동료애

 

함께 후보에 오른 배우들을 향한 겸손과 

배려의 동료애를 아끼지 않는다.

 

"우리 후보들 모두 각자의 영화에서 수상자에요.

우린 서로 다른 역할을 연기했고, 경쟁할 수 없죠.

오늘 밤 저는 단지 운이 좋았던 것뿐이에요"

 

 

#4 워킹맘 윤여정의 가족애

 

배우에 앞서 최선을 다해 일한

싱글 워킹맘, 엄마 여정.

 

"저를 일하게 만든 두 아들에게도

고맙다고 말하고 싶네요.

사랑하는 아들들아,

엄마가 열심히 일한 결과란다."

 

 

#5 에필로그

 

50여년 전 배우 여정의 시작을 있게 해 준

은인에게 감사를 전한다.

 

"이 상을 저의 첫 감독님,

김기영 감독님께 바치고 싶습니다."

 

 

|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윤여정의 말

오스카에서의 여우조연상 수상소감도 물론 인상 깊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시상식 직후 한국 기자들과 가진 생방송 기자 회견장에서 남긴 윤여정 배우의 답변들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기자회견중 윤여정 배우의 답변을 차마 담지 못한 자막 (KBS News)

기자회견의 마지막 질문으로 윤여정 배우의 역사적인 수상을 위해 함께 응원해 준 국민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린다며 (매우 정형화된 질문으로)기자회견을 마무리하려던 순간이었다. 윤여정은 상을 타고 보답할 수 있어 정말 감사하다며 첫 운을 땠지만 본론은 그다음부터였다.

 

"난 후보에 오른 것만이라도 영광이었고

상을 받을 생각도 없었다.

운동선수들의 심정을 알겠더라.

2002년 월드컵 때 축구 선수들 발 하나로

온 국민이 난리 칠때

얼마나 정신없었을까.

너무 안됐더라.

김연아도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리고

 

"눈 실핏줄이 터질 정도로

난생처음 받는 스트레스였고

즐겁지 않았다"

 

국민들의 응원이 즐겁지 않았다니, 살짝 당황스럽긴 했지만 너무나도 윤여정 다운 솔직한 마무리였다. 하지만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의 말에 충분히 공감했기 때문이다. 

 

2015년 영화전문지 맥스무비의 기사 (보러가기)

우리가 언제부터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 영화, 한국 사람을 찾아보게 되고 수상까지 기대하게 됐지? 불과 몇 년 전만해도 국내 영화 전문지에서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 영화가 외국어 영화상 후보조차 오르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분석하는 기사를 내기도 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202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한국 영화 최초의 작품상, 감독상 등 4개 부문 수상을 시작으로 2021년 올해는 [미나리]의 윤여정 배우가 한국 배우 최초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오스카에서 한국 영화의 역사적인 여정을 이어나갔다.

 

그렇지만 윤여정은 오스카에서 여우조연상을 거머쥐기 위해 [미나리]에 출연한 것이 아니다. 그냥 늘 그래왔던 것처럼 그녀가 선택한 일에 하루하루 치열하게, 충실히 임했을 뿐이다. 마치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윤여정이 연기한 할머니의 대사처럼.

 

"나는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

대신 애써서 해"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윤여정 대사

 

거침이 없지만 웃음과 공감을 자아내는 배우 윤여정의 말. 그 맥락을 들여다 보면 배우로써, 엄마로써 충실한 삶으로 다져진 단단한 솔직함, 연륜과 경험 위에 군림하지 않는 담담한 겸손함, 자연스럽고 당당한 자유로움이 담겨있다. 바로 이것이 외국어의 장벽도 단숨에 허물어 버리는 윤여정 화법의 아우라다.

 

 

킴진 | KIM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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